#eye #eye
계간홀로 16호.


<비연애라서, 연애>

“네가 있는 곳이 나의 집이야.”

내가 좋아하던 어느 드라마의 대사를 고스란히 읊어주던 연인이 있던 때가 있었다. 그 이후 몇 번의 연애를 지나 나는 ‘네’가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을 집으로 삼기로 했다. 서울의 다섯 평도 되지 않는 좁은 내 셋방에는 여러 사람이 들어갈 틈이 없고, 나는 살이 부대끼는 더위를 참을 한 조각의 여유조차 없다.

그때는 구원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어느 날, 문득, 와줄 거라는 희망을 구체화하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가난한 내가 우연히 재벌을 만나 그의 유일한 구원자로서 상처를 치료해주고 답례로 영원한 사랑을 약속받는 그런 드라마들을 줄줄 읊으며 구원의 형태를 인지하기도 전에 암기했다. 특정 성별로 태어나, 해당 성별로 살아가며, 나 하나만을 사랑하는, 어떤 외형을 가진 타인. 그 특정한 타인이 무릎 꿇고 나타나 반지 하나 내밀면 행복해야 해. 타인이 구원이야. 그렇게 촘촘하게 구성된 사랑의 정상성은 사랑의 중심에 서 있는 애매한 것들 - 감정, 온기, 안도 따위를 제 필요에 맞춰 마음껏 조각해냈다. 따뜻해서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가 구원이기에 반드시 따뜻해야만 했다. 모든 우연과 순간의 설렘, 완연한 불안은 꼭 사랑이어야만 했으며 도사리고 있는 운명적 타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한 노력은 필수였다. 타인이라면 사랑했고, 나를 사랑하게 했다. 하지만 나의 필사적인 구애가 가져온 결실은 운명과 우연이라는 우아한 이름으로만 드러나야 한다고 이미 약속되어있었다.

이런 연애가 발에 챌 만큼 늘어나고 문득 생각했다. 왜 재주를 넘어 구색을 갖춰 놓으니 모든 공은 운명적 사랑한테 넘겨야 하지? 모든 성공한 우연은 나의 치밀한 계획이자 비싼 실패의 끝이었는데. 어느 하나 쉬운 연애가 없었는데. 목적이 구원에 있고, 행위자는 운명, 수익자는 조각된 타인이라면 그 사랑에서 나는? 나는 어디에 있지? 나의 구원, 나의 사랑, 나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택도 노력도 하지 않아야 했다. 필연적으로, 사랑의 근원이 되는 어느 무형의 이끌림에 따라, 나는 늘 반드시 특정한 타인을 사랑해야 하만 했으니까. 질렸다.

나는 나를 나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가정해 봤다. 누군가의 반쪽은 다채로운 인간의 형태로, 생물의 형태로, 무형의 감각으로 존재하고 있다면, 나의 반쪽은 나머지 반쪽에 꼭 붙어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가정하고 시작하는 연애는 익숙해져 있었고 나는 아직 연애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내일을 살기 위해 구원이라는 목적으로 도저히 놓을 수 없었기에 (어차피 원래 내 것이었던) 행위자로서의 위치와 수익자로서의 이득을 챙기기로 했다. 그래서 타인도, 운명도 없이 사랑받고 사랑하기 위한 모든 노력의 공로를 나에게 바치기로 했다.

이건 정상적인 사랑을 위해 버렸던 나를 되눕고, 나와의 미래를 설계하고 토론해나가는 매우 복잡한 연애다. 사랑이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관계라면 나는 요령껏 회피했던 과거와 다시 마주쳐야 하고, 사랑이 행복이라면 무엇을 해야 내가 행복할지 고민하고 행동하고 실패해야 한다. 이전처럼 멋들어지게 한 번에 성공할 수도 없고, 경악을 할 수도 없다. 싸울 일은 더 많다. 빨래는 왜 이렇게 하기 싫고 아침에는 일어나기 왜 어려울까. 동기부여도 안 된다. 뭘 해도 기뻐하는 표정을 보며 고된 노력이 씻겨 내려가는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예상했던 것보다 수익성이 많이 떨어지고 투자만 왕창 하게 된다. 그렇지만 생경한 감각들을 만날 수 있다. 어쩌면 다시 나 아닌 무언가와 연애를 할지도 모른다. 그게 사람일지, 다른 생물일지, 어떤 감각일지는 모르지만. 단발적인 온기는 보일러를 끄면 사라지기 마련일 걸 이제야 알았다. 수족냉증에는 홍삼을 마시고, 침을 맞고, 주기적으로 운동을 해줘야 한다. 구원자의 적합한 조건에 부합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드는 안도감보다 내가 생각보다 게으른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하는 발길질이 삶에 더 생산적인 걸 알았다. 나는 아직도 여유가 없고 화가 많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하는 법을 알고 결국에는 돌아보게 할 줄 안다. 언젠가는 내가 나를 돌아봐 주겠지. 혹은 돌아봐 줄 어떤 것을 스스로 선택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