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유머를, 고립이 연대를 이끈다
- 이시마의 개인전 《소녀a의 일기장 속 슬픔을 알지 못하는 너는 장례식에 올 수 없어》
이전이라면 아마 그냥 지나쳤을 듯한 “퀴어와 트랜스”라는 문구에 자라가슴이 되었다. 퀴어와 트랜스가 다른 거였구나! LGBTQIA 같이 계속 수평으로 차이가 첨가될 너르고 포용력있는 위치성-범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퀴어가 트랜스를 배제하거나 트랜스가 퀴어와 분리되는 일상, 상황이 있다는 것을 저 문구가 ‘와(and)’로 보여주었다. 수평적 확산이 평등에의 강박이라면 수직적 위계는 당사자에게는 현실이다. 퀴어도 정체성 담론에 포섭되면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수순을 페미니즘처럼 밟고 있는 것이고, 트랜스라는 과도기적 상태가 정체성 퀴어를 위한 타자로, 혐오적 차이로 재구성되는 중인 것이다. 터프 페미니즘이 페미니즘을 순수화하려는 ‘당연한’ 욕망에 기반하듯이 퀴어성도 그렇게 타자를 통해, 타자의 타자화를 통해 내부를 만들고 있구나.
근래 접한 트랜스 당사자의 텍스트 중 하나인 호영의 산문집에서 “게이나 레즈비언에 비해 양성애자나 무성애자는 상대적으로 덜 가시화되어 있다. 퀴어 공동체 내에서조차 이들은 ‘정치적으로 쓸모없다’는 비난을 받거나 ‘유행과 어린 나이 때문에 취하게 되는 과도기적 정체성’으로 치부되기도 한다”는 문장에 줄을 쳤다(호영, 『Never Mind 전부 취소』, p.199). 지젝은 “트랜스젠더리즘(Transgenderism)”을 두고 “그것은 개인이 그/그녀의 생물학적 성(그리고 태어나면서 사회에 의해 그에게 할당된 메일 혹은 피메일과 같은 그에 상응하는 젠더)과 그/그녀의 주관적 정체성 사이에서 불일치를 경험할 때 일어난다. 그것은 그렇게 해서 ‘여자처럼 느끼고 행동하는 남자들’과 그 반대에 관계할 뿐 아니라 추가적인 ‘젠더퀴어’ 포지션들의 복잡한 구조에도 관계한다―바이-젠더, 트라이-젠더, 팬젠더, 젠더플루이드, 무성애자(agender)까지. 트랜스젠더리즘을 떠받치는 사회적 관계들의 궁극적 비전은 이른바 포스트젠더리즘이다.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운동으로 이 운동의 지지자들은 최근 과학적 진보가 생명공학과 재생산 테크놀러지들에서 가능케 만든 젠더의 자발적 폐지를 옹호한다”고 썼다(지젝, Courage of Powerless, p.205).. 생물학을 근거로 “퀴어(와 트랜스)”를 기형이나 질병으로 보는 관점을 유전학 전공자가 무수한 반례를 들어 해체하는 짧은 글도 읽었다(최정균, “생물학적 현상은 사회적 낙인에 의해 ‘손상된 정체성’이 된다”, 경향신문, 2024년 4월 17일자 기사) 남웅의 “젠더퀴어나 트랜스젠더는 어디서 모이지? 하고 묻게 되면 당장 떠오르는 공간이 없어요. 정체성 집단과 일치하지 않는 이들의 공간은 협소해지는 거죠”와 리타의 “레즈비언 업소 대부분이 mtf 트랜스 젠더의 입장을 제한한다”(121)는 문장에 역시 밑줄을 친다(이연숙·남웅, 『퀴어미술대담』, p.121). 남웅은 갈 곳이 없는 트랜스들, 공통의 장소가 없는 트랜스들이 “행성인 같은 성소수자 인권 운동 자체에 많아졌다. ..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성원이 찾을 수 있는 공동체를 떠올릴 때 막막함이 따라와요”라고 걸맞는 장소를 찾지 못한 소수자들, 즐길 장소가 부재하는 소수자들이 인권 운동 단체에 모여드는 기이함에 대해 설명했다. “행성인”이 발신자인 ‘고(故) 이연수 활동가’의 향린교회 추모식 관련 문자를 J가 포워딩했고, 트랜스 앨라이인 나는 트랜스의 비장소, 무장소성에 대해, 표류가 곧 삶인 이들의 사라짐에 대해 또 알게 된다.
이시마 작가의 개인전 《소녀a의 일기장 속 슬픔을 알지 못하는 너는 장례식에 올 수 없어》에 대한 비평문을 써 달라는 메일을 받고, 전시 마지막 날 퍼포먼스에 참여하고, 그날 그곳의 이상한 풍경을 체화하려 애쓰며, 이런저런 글을 읽으며, 내가 잘/충분히/제대로 알지 못하는 트랜스들에 대해 생각하고 읽었다. 시마에게 첫 메일을 받은 이후 이 글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은 뒤죽박죽으로 엮이고 감정은 여러 겹으로 뒤얽히고 마음은 밖으로 서성댔다. SNS를 하지 않는 내가 어렵사리 이시마의 인스타 스킨에 도달해서 시마가 대문에 적은 글자들, 이미지들을 읽었다. they라는 ‘정체성’이나, 무지개 깃발 옆에 적힌 ‘messy dirty liminal space’도 보았다. 지젝은 정신분석이 이미 자아는 분열이고 타자가 자아의 장소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굳이 트랜스젠더 담론이 왜 필요한가 반문하면서도 그들에 대해 배우고 그들의 실존의 정치와 윤리를 읽으려고 한 것처럼, 퀴어는 정체성이 아니라 태도라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정작 제일 친한 퀴어는 대체로 게이인 내가 시마에 대해 쓴 글은 과연 트랜스들과 접속할 수 있을까? 행여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시마가 굳이 왜 내게 글을 부탁한 것인지는 묻지 않았고, 대신에 나는 계속 내게 도착하는 이상한 사람들, 자신의 유일무이함을 직접 공표하지 않으면 살아있음도, 삶의 방식도 알려지지 않을, 거의 잊혔거나 거의 죽은 이들에 대해 읽고 미메시스하고 자꾸 생각했다. 내 글이 가시화할 시마가 저쪽의 시마와 닮았기를 희망했다. 내가 보자마자 알아본 사람이라면 굳이 긴 글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몇 문장의 암호나, 몇 줄의 연서나, 한 두 페이지의 에세이이어도 된다. 그러나 시마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그럴 때는 말이 길어지고 횡설수설하고 두서없어지고 더 말하려고 하게 된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고 그러면서 they가 단수인, 혹은 복수인 나로 살아가는 사람의 상태에 눈꼽만큼이라고 다가가 있고 싶다. 나를 ‘그들’이라고 말하면 문법이 깨진다. 질서가 불가능하다. 그런 삼인칭 복수 인칭 대명사로 자기 삶을 살아내거나 설명한다는 것은 내게는 생각의 박탈이고, 표류이다. 일인칭 인칭 대명사 ‘나’로 자아의 타자성을 이야기하는 나는 대체로 안온하다. 문법이 일상이고 깨질 때는 사건이니까. they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것은 불가능, 추락, 허물어짐, 현기증이다. 바깥을 지향하는 의식적 주체의 글쓰기와 이미 항상 바깥으로 살아가는 당사자들, 타자들의 삶 사이, SNS를 하지 않는 나와 공통의 장소로 SNS를 전유하는 시마 사이에서 내 글은 버둥거릴 것이다.
전시 마지막날인 7월 28일 신생공간 김예(gimye)를 방문했다. 아직 시마와는 이야기를 나눈 것도, 시마가 어떤 작업을 하는 작가인지도 잘 알지 못한 상태였다. 전시장 입구에서 발목에 ‘고양이 방울’을 달아주었고 걸을 때마다 소리를 내게 되었다. 방문객들은 다른 방문객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퍼포먼스가 시작될 무렵에는 좁은 전시장에 20명 이상의 관객이 모였다. 휘이이 둘러보다가 내가 좋아하는 형식으로 배치된 신작 <_아톰보이ATOMBOY> 앞에 앉았다. 낡고 오래된 작은 tv 수상기는 쪼그려 앉을 것을 명령하고, 만화를 시청하는 아이의 작은 크기로 몸을 접고 구부리면 수상기가 작가-아이의 세상을 연다. ‘난 너의 아톰보이’가 후렴구처럼, 전시장을 나온 뒤에도 귓가를 맴도는 노래로 재생되었고,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에서 찍은 구름, 비행기 안에서 아이패드로 책을 읽는 여자, 식사로 나온 포일 그릇의 스파케티를 우걱우걱 먹는 (여자아이의)입이 보였다. 비행기를 타고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가고 있는, ‘트랜스’ 상태의 여주의 ‘경험’을 훼손하려는 듯, 화면은 어딘가에서 차용한 파운드 푸티지를 왜곡·조작한 영상 이미지를 덧입으면서 초점을 상실한다. 영상의 앞 부분이 경험에 대한 것이라면 후반부에서는 그 경험을 가짜로, 단지 하나의 이미지로 대우하는 ‘시선’이 첨가되어 시선을 어지럽혔다. 물론 앞 부분 기록 필름도 색보정을 전담한 필터의 사용으로 인해 현실보다는 비현실로 감지되었다. 촬영, 편집, 사운드, 노래 모두를 전담한 신작 <_아톰보이ATOMBOY>를 놓고 시마는 “엄청나게 사적인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작업이 공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이면서 작품이라면, 이것은 오직 자신의 ‘쾌락’만을 보유한 작업이라고 했다. 시마가 메일로 보내온 ppt 자료의 맨 처음에 적힌 문장이 이랬다. “평생을 비행기를 타며 살았다. 세 시간만 지나면 상식이 비상식이 되고 불법이 합법이 되는 걸 목격하며 세계가 깨지기 쉬움을 깨달았다.” 일일생활권인 글로벌 여행이나 자본주의적 이주는 동시대 조건이다. 자신의 글로벌한 경험이나 인식을 코스모폴리탄으로 혹은 디아스포라로 구조화하는 작가들을 늘 접한다. 시마가 새로운 것은 그 두 위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세계의 허약함(fragility)을 간파했다는 것이다. 이 세계를 파노라마적 흥미로움의 배경으로 만들거나 이 세계를 ‘귀향-중(中)’으로 재전유하는 대신에 시마는 이 세계의 인공성, 환영적 특성을 붙들었다. 구름 곁에서 먹고 보고 읽는 자신을 찍고 그 뒤에 그것마저도 얄팍한 필름 껍질로 만드는 관점을 첨가한 것이 명민하고 정확해 보이는 이유이다. 내가 궁금해서 물었던 것은 왜 스파게티를 저렇게 먹고 있는가였다. 일부러 연극적으로 과잉으로 버릇없이허겁지겁밥맛떨어지게 먹는 장면을 연출한 것인가? 시마는 천진한 표정으로 자기자신이라고, 늘 그렇게 먹는다고 설명했다. 가부장적이건 페미니스적이건 사회화된 여성이 ‘남들’에게 인정받고 남들과 동화되길 원하며 찍은 나르시시즘적 자기-재현이 부재한다. 자아가 타자로부터 온다는 이야기는,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이미지란 철저히 사회화된, 규범화된, 이데올로기화된 자기이기에 그것은 고유한 내가 아닌 바깥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 점에서 시마가 찍은 자기-이미지에 여성에게 내면화된 사회적 이미지가 거의 부재한다는 것이 내게는 놀라웠다. 자기-자신이라는 것은 결국 사회화, 사회적 인정의 욕망이나 강제에도 불구하고 어느 만큼이나 비틀린, 환원불가능한, 비동일시를 일으키는 부분을 보유하고 있느냐와 직결된다. 시마가 자기-입을 클로즈업해서 흡입하는 “(입)구멍”을 강조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미움받는다는 것을, 그러나 그 미움에 별 불만/관심이 없다는 것을 방증한다(완성된 글에 이후에 ‘초자아-검열을 전제로 한 셀피의 구조를 흡입의 쾌락이 훼손한다’란 문장을 첨가한다. 대항-나르시시즘!).
퍼포먼스를 위해, 전시장 안쪽에 설치된 “상담실”에서 시작된 노란 색의 긴 천이 깔려 있었다. 나는 그 위에 묻은/칠해진 붉은 얼룩을 자해의 지표, 알레고리 같은 것으로 읽었는데, 그런 오독과 읽기에의 강박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오독일지라도 내게는 자해하는 어린 여자애들, 이란 집단성, 공통성이 각인되어 있으니. 나는 그렇게 알아봤고 읽었다. 시마는 1주일의 전시 기간에 100여명 정도의 관객이 전시를 보고 갔고 그중 40여 명 정도가 “상담실”에 들어가서 하고 싶은 것을 했다고 했다. 시마는 울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을 갖지 못한 친구들이 많다고 했고 그들을 위해, 안에서 울건 소리치건 자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그 방을 만들었다고 했다. 내부―방, 집, 우리―에서 배제된 이들, 바깥이 삶의 장소인 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작가보다는 활동가로서의 시마의 의도에 의해 조성된 방에서 울고 혼잣말을 하고 고백을 한 이들의 행위를 그런데 시마는 재화로써 사겠다는 공고문을 방안에 붙여 놓았고, 상품 구매에 준하는 행위를 이후 관객들과 치렀다고 했다. 이번 전시의 주제를 시마는 “우울의 진정성”이라고 처음 메일에 적어보냈다. 진정한 우울과 진정하지 않은 우울을 구분하려는 권력이 정체성 헤게모니를 장악한 채 가짜들, 불순물들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진정성은 언제나 권력을 쥔 자들의 이데올로기이고, 시마는 그런 사회적 구조를 미러링하면서, 자신이 만들어놓은 링 안에서 울고 소리지르고 말하는 이들의 슬픔과 우울의 진정성을 흐릿하게 하려는 듯, 구매자 행세를 (자처)했다. 그런 부자연스러움 안에서 운 자들은 진짜 우울한 자이거나 가짜 연기자일 것이다. 40여명의 참여 관객이, 덫에 걸린 것인지 덫을 무시한 것인지 덫을 즐긴 것인지는 모호하다. 시마도 참여자의 숫자에 놀란 것을 보면 이것은 압도하는, 작가의 힘을 초과하는 관객의 정동, 논리와 실험을 진압하는 몰입이다. 으스스하다.
마침내 “상담실”에서 두 눈을 가리고 한복 저고리를 응용한 의상을 입은 시마가 나왔다. 오직 자신을 위한 노래인 아톰보이를 부르며, 또 “내가 죽으면 윤이는 울까, 엄마는 울까”라는 대본을 읊으며 시마가 전시장 입구까지 나갔다가 뒤로 돌아서서 노란 천을 관객들과 함께 찢는 의식을 시작했다. 천은 단단했고 찢으려면 천을 들고 있는 관객들과 시마 모두의 힘이 필요했다. 시마가 방으로 들어가면서 퍼포먼스는 끝났다. 시마가 퍼포먼스에서 차용한 의례는 진도 씻김굿이었다. 평생을 비행기를 타고 떠돈 데는 국악 퍼포머인 엄마의 무수한 외국 공연도 한 몫했다. 엄마의 무대에 수없이 연행자로 섰던 시마는 이제 자기 무대에서 그때 엄마에 의해 자신에게 각인된 전통 극을 부분적으로 차용해서 공연한다. 퍼포먼스에서 시마는 샤먼이었다. 샤먼은 어떤 문화에서는 6~7개까지 복수화되는 젠더를 입은 타자이다. 샤먼은 공동체의 슬픔, 한을 풀어주는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산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는 미디움, 그야말로 liminal space이다. 시마는 내게 자신을 연구자, 활동가, 당사자로 소개했는 데 예술가라는 또 하나의 페르조나까지 덧붙여야 할 것이다. 시마는 전시장이라는 비장소를 물리적 커뮤니티가 거의 없는 트랜스의 일시적 장소로 점유했다. 이번 전시는 “소녀a의 장례식”이라는 무대를 외연으로 한다. 무수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이야기들을 역시 당사자이자 연구자, 활동가로서 다시 쓰고, 그 이야기를 개인 작가의 작업이자 활동가의 공동체적 실천이자 당사자의 고백적 재현이 교차하는 지점에 풀어놓는 시마의 작업이 매력적인 것은 온통 여자들 이야기이고, 온통 여자들의 얼굴과 몸이 직접 등장하고, 그럼에도 이야기가 현실, 재현의 그물망에서 계속 벗어나 버린다는 것이다. 가령 아래에서 볼 2022년 영상 <KZPZ>가 보여주듯이.
전래 동화 콩쥐팥쥐를 인용하면서 해체하는 <KZPZ>의 앞 부분은 역시 당사자의 경험-현실-재현의 무거움이 차지한다. 한 여자아이가 등장해서 계모의 폭력, 아버지의 방임과 폭력 가담 등에 대해 증언한다. 화면이 흑백이고 증인이 현재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 수 없기에 지금 자신은 유서를 녹화하고 있다는 화자의 발화가 진짜처럼, 불길한 공포를 발산한다. 이게 진짜 아카이브면 어쩌지, 라는 불안이 엄습했다. 그런데 갑자기 화자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기 상황의 유일한 대안으로 “내가 나를 때리겠다”고 선언한다. 콩쥐를 상대로 한 가족의 폭력, 소수자를 상대로 한 사회와 국가의 폭력이라는 기시감이 엄습하는 만연한 폭력의 구조를 벗어나는 이 텍스트의 기발함은 피해자에만 머무르지 않고 가해자이기로, 주체와 대상이 곧 자기자신인, 자신을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트랜스 상태에 놓겠다는 결의에서 나온다. 내게 이 문장은 기존의 저항의 법을 해체하는, 엘리트(필자인 나?)의 환상이 부재하는 바로 지금 일어나는 혁명, 혹은 읽을 수 없는 ‘희망’으로 읽혔다. 모두가 나를 때리는 사회에서 나도 나를 때리겠다, 는 선언은 피해 당사자를 현실의 고통에서 유희의 장소로 옮겨놓는다. 물리적 폭력과 자신에게 극악한 위해를 가하며 정면을 응시하는 퍼포머들의 차이를 우리는 안다. 혹은 자해가 곧 생존이고 삶의 방식임을 직접 알려준 당사자 여자아이들의 수기들, 기록들을 안다. 이제 이곳은 현실이 아니라 가짜 세계, 미적 인공성의 세계, 현실이 하나의 소재처럼만 인용되는 세계로 바뀐다. 거기서 한 명이었던 여자아이는 여기서는 두 명으로 바뀌어 있다. 흑백 화면은 컬러로 바뀌어 있다. 분신, 자매, 연인, 친구, 여성‘들’은 폭력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피해자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한 집에서 차를 마시고, 함께 이를 닦고 음식을 해먹고 담배를 피우고 울기도 한다. 루즈를 이용해서 목 언저리에 폭력의 흔적을 흉내내고 그러고 있다보면 역시 또 화면에 편집기술을 응용한 또 다른 이미지들이 표면으로서 첨가된다. 현실이 초현실/ 비현실적 이미지들과 중첩되고, 노래를 너무나 잘하는 시마가 부른 <두껍아 두껍아>가 까끌까끌한 영상에 미적 쾌를 입힌다. 당사자들이 영상에 협력자이자 배우로 등장하고, 현실과 가짜 현실이 섞이고 우리가 아는 피해자와 뒤집고 유희하는 자가 뒤섞이면서 제대로 읽기 어려운 텍스트성이 범람한다.
<_아톰보이ATOMBOY>를 제외하면 시마의 영상은 대부분 당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를 둘의 ‘대화’를 통해 다른 텍스트로 변용하는, 즉 당사자의 경험이면서 동시에 미적으로 차용된 허구적 텍스트인 모호한 글쓰기들이다. 각 텍스트가 구사하는 전략이 다르다. 각 이야기를 들려주는 타자, 내부자-당사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영상 <dir>, 우리 말 ‘약’의 알파벳 오타 ‘dir’을 제목으로 달고 있는 영상에서 시마는 4년 동안 만난 남매성폭력당사자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역시 텍스트로 바꾼다.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중첩된 자리에 놓인 가상의 인물 “윤”은 글자그대로 they이다. 시마는 전시장에 올 수조차 없는 힘겨운 삶을 사는 이들에게서 그들이 먹고 있는 약과 약봉지를 전해받았고, 그것을 사용불가능한 수영용 튜브,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투명한 ‘조각-작품’인 튜브에 넣었다. 그리고 한강에서 자살한 이들을 따라 한강에 가서 자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자조 섞인 밈(의 문화)를 끌어들여 그 튜브를 한강에 띄웠다. 시마는 “이 약이 나를 가라앉지 않게 뜨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라는 당사자의 문장을 글자 그대로 한강에서 수행했다. 그러나 써먹을 수 없는 튜브인 작품이 약 덕분에 살고 동시에 약 때문에 힘들어지는 생존자의 일상을 환유적으로 시각화한다. 남매성폭력 생존자라는 가정 내 성폭력 문제의 말단 부위가 가시화되고, 당사자에 대한 인터뷰가 스크립트로 들어오고, 활동가의 임무가 흐릿해지는 미적 장면, 거듭 미끄러지면서 줄곧 시도하는 시마 자신의 위태로운, 그러나 즐기는 몸이 영상에서 더 중요해진 느낌도 든다. 고통이 있고 해석이 있고 이 텍스트를 커뮤니티 문화로 이해가능하게 만드는 밈의 자조가 있고 상황을 유일하게 즐기는 시마(의 헐떡이는 몸)가 있다.
“트랜스젠더 주체들의 윤리적 위대함은 그들이 ‘탈인격화/이인증depersonalization’를 거부한다는 사실, 주체로 남으려 한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규범화된’ 주체성들보다 더 급진적으로 주체성의 교착상태deadlock를 추정하면서도. 트랜스젠더 주체들은 자기들의 즐거움의 공간을 상호주체성에서 전혀 빼려고 하지않는다. 그들은 즐거움을 위한 추구를 대상들에 대한 직접적인 교제dealing 안에서 실행한다”(지젝, 앞의 책, p.192). 지젝은 자신에게 이런 앎을 전달한 구체적 사례들은 제시하지 않는데 나는 시마의 작업이 그 예시라고 생각했다. 당사자들이 자기자신(의 고통과 현실)을 연기하면서, 당사자와 협업하는 시마와의 상호주체성을 통해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일시적 대항력을 발휘하면서, 그것을 무의미한 즐기기의 장면 안으로 옮겨놓으면서, 이들 둘 혹은 셋 혹은 스무명이 함께 즐길 때, 그런 힘없는 연대와 유희의 공존이.
시마는 내게 “시스젠더가 신기하다. 내가 섹슈얼리티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성애자했겠냐?라는 유머가 좋다”고 했고, 2-30대 페미들, 퀴어들, 트랜스들을 겪고 배우는 나도 저 말을 입에 넣고 반복한다. 내게도 소녀시절이 있고 여성-되기에 실패했던 기억이 있고 여성에서 벗어난 지금이 있으니. 소녀는 이미 항상 트랜스이고, 여성-되기를 거부하거나 여성-되기에 실패한 이들 ‘기타등등’의 고통과 유머가 내게는 ‘희망’인 이유이다. 현주와의 협업이고 현주가 등장인물인 <언니들은 너무 무서워서 다 죽어버렸어>에서 현주가 시마가 보낸 문장을 읊는다. 나는 이 문장이 좋아서 이 글의 마지막에 그것을 놓는다. 설명하기보다는 낭독하고 싶은, 끊어지지 않는 삶의 비천함과 취약성, 그리고 우리의 정당성을 공표하는 글을.
“나는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 고민하고는 해. 이게 정말 내 잘못일까? 언제까지 내 존재가 잘못이라 힘들어야 하는 걸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 우리의 혁명의 과정은 지난하다는 것을. 버티고 살아내는 사람들의 대단함이 너무 일상적이라 우리는 몇 배로 강하지 않으면 오히려 평범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런데 말이야, 나는 생각하고는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나는, 이런 고민을 하는 우리는, 무엇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결국 뭔가를 하고, 하기 위해 투쟁하고, 하기 위해 고민하잖아. 우리는 왜 우리의 싸움을 낮잡아 말할까? 우리는 왜 우리의 고통을 말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우리의 전쟁을 우리가 흘린 피를 우리의 슬픔을 우울을 불안을 위태로움을 열정을 무력함을 좌절을 고민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하지 않음을 해냄을 투쟁을 승리를 패배를 의미를 의의를 무시받음을 연대를 혐오함을 혐오당함을 배제당함을 소외를 포옹을 아픔을 사랑을 더 더 더 더 크게 말하지 못할까?”
양효실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