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등바등’. 순리를 거스르고 억지로 밀어붙이는 듯한 뉘앙스를 담은 이 단어는 온건한 표면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우아하지 못하고 유별난 것으로 취급받는다. ‘아등바등’ 살지 않기 위한 조언을 담은 글과 책이 넘쳐난다. 그러나 과연 모두가 우아할 수 있을까. 사회를 거스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는 삶이 언제나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아등바등’ 해야만 하는 삶과 상황은 어디에나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평생을 악의와 혐오에 맞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악의가 악의가 아니라고 모두가 말한다면, 맞서기 위한 모든 행위는 마치 허공에다 하는 주먹질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그 악의와 맞서온 삶조차 흐릿하게 지워진다.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삶을 쉽게 지우지 않으려면, 먼저 그들이 맞서는 악의를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보이는 것’과 싸우는 일과 ‘보이지 않는 것’과 싸우는 일은 출발선부터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혹시 ‘아등바등’ 사는 삶이 불편하거나 우습다고 생각되는가. 축하한다. 당신은 평생을 가시적인 삶 속에서 살아온 운 좋은 사람이다.
보이지만 보지 않는 것
이시마 작가의 개인전 《가을놀이》는 한 편의 추리극 같은 전시다. 작가는 보이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곳, 가려진 것들 사이로 진실의 파편이 부유하는 세계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결론을 제시하기보다 관객 스스로 발견하고 시도하기를 기다린다.
손전등을 들고 어둠 속으로 들어서면 전시장 전체를 뒤덮은 비닐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노랫소리가 들린다. 붉은 화면 속 여자의 모습, 지연되는 발음과 목소리, 반복되는 노래와 격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갇혀 싸우는 듯한 누군가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캄캄한 공간에 누워 듣는 목소리는 실화인지 아닌지 구분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전체의 이야기도 알 수 없다.
한쪽에서는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물속에서 허우적댄다. 가라앉지 않도록 그나마 몸을 지탱하는 것은 투명한 부표다. 부표 안에 담긴 색색의 알약들은 그가 무엇에 의지하고 있는지 힌트를 준다. 겨우 물 위로 고개를 내민 여자는 부표를 의지해 더 위로 올라서려고 하지만 부표는 계속 뒤집어지고, 때로는 놓치기까지 한다. 주변엔 아무도 없다. 혼자서 밸런스를 맞추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싸움이다.
이 사투의 장면과 관객 사이에는 투명한 설치 작품과 창문이 존재한다. 영상 작품이 실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면, 누군가 겪은 실제 사건과 관객 사이에는 3개의 장막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렇다. 우리는 타인의 삶과 이토록 멀다. 그의 주변에 뿌려진 조각들을 주워 이야기를 이어 볼 뿐, 백퍼센트 알기는 어렵다.
작가는 겹겹의 막으로 가려진 것이 타인의 삶이라며 거리감을 만드는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더 제시한다. 바로 ‘보인다’는 점이다. 활짝 열린 창, 투명한 작품, 격렬한 움직임은 어쩌면 ‘보라’고 만들어진 것들이다. 우리가 외면하지 않고 보려고 노력한다면 누군가 애써 맞서는 삶, 노력해서 전하려는 이야기를 충분히 보고 들을 수 있다.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지라도.
유령과 싸우는 일
삶은 원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지만, 보이지 않는 것과 싸우는 일은 더더욱 외로운 일이다. 혼자서는 힘에 부치는 싸움을 지속하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때, 심지어 그 애쓰는 행위조차 부정당할 때의 고독은 마치 유령과의 싸움에 비견할만하다. 하지만 살아남고 이겨내려고 애쓰는 사람의 모습은 완전한 타인이 아니다. 전시장을 부유하는 파편들 사이에서 무언가와 맞서기 위해 ‘아등바등’ 했던 언젠가의 내 얼굴을 만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b.1906)는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관해 이야기한다. 자신이 하는 행위의 의미를 모른다면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커다란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온한 사회나 가정의 겉모습을 지키기 위해, 또는 나의 안일한 평화를 위해 모르는 척 지나친 것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누군가의 숨통을 짓누르는 거대한 악의가 된다. 심지어 그렇게 눈이 먼 ‘평범한 악’은 명백한 악행을 덮어주기까지 한다.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가 악행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모든 악을 뒤집어쓰는 것은 피해자의 몫이다.
이시마 작가는 이러한 악의 속에서 억압과 차별을 받으며 살아온 피해자들이 어떤 식으로 밸런스를 맞추며 삶을 재생하는지, 그리고 일정한 임계치를 넘어섰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작가는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수동적인 타자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 호명하는 말이자, 그동안 살아남았고, 또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선언이다.
‘아등바등’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을 이루려고 애를 쓰거나 우겨대는 모양’이다. 무언가를 이루려고, 나아가려고 애쓰는 것은 절대 우습지 않다. 특히 그것이 살아남기 위한 것일 때에는. ‘한순간이라도 정상의 세계와 맞닿을 수 없는’ 곳에서 ‘하늘을 걷고 바다를 맞으며 날아오는 별들을 피해 밤을 새우며’ 버텨왔다. ‘조용하게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깨진 마음을 다시 주워담으며’ 멋지게 ‘아등바등’ 견뎌온 모양은 오히려 생을 좇는 숭고한 행위가 된다. 이것이 우아한 삶이 아니라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머나먼 혁명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없다. 우리의 삶은 하나뿐이며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만히 있기보다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어디까지 참고 어디까지 견딜 것인가, 맞서 싸울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내 삶의 경계는 내가 정한다. 이것을 방어나 복수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장 가까운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시마 작가는 전작 <이름생존자>에서도 그랬듯이 가려지고 지워진 이야기들을 모아왔다.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며 하나의 맥락으로 재구성한다. 책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의 제목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작가는 흩어져 있는 목소리를 이어 우리의 눈 앞에 드러낸다. 공감과 연대의 끈을 이어 주며, 살아남은 자들이 여기에 있다고, 그러니 당신도 살라고 소리 내어 말한다. 유령과 싸우는 이가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유령은 더이상 유령이 아니게 되고, 맞서 싸우는 삶은 양지로 걸어 나온다.
아렌트는, 타인의 입장과 자신의 행위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할 때 평범한 악이 탄생한다고 했다. 악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평범한 악’이 되지 않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유령에 맞서는 날들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올 수 있으므로. 그러니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을 외면하지 않은 채 가려진 진실과 희석된 악의를 감지하는 일은, 작가가 이어 준 끈을 잡은 우리의 과제다.
전시 서문: 김지연(@paradisegreen__)
전시 협력: 탈영역 우정국
퍼포펀스 협력: 김해림, 송동영, 임지수, 이예주, 고다연, 유진, 정설향, 오승은
디자인: 이송희 (@drawing_okipoki)
레코딩&믹싱 마스터링: 25 @ Back To the Garden
나레이션: 우지안
움직임: 배현정